나스 키노코 인터뷰. 찬란한 별의 꿈 ω ^ )ノシ < 날번역



본 인터뷰는 미니코미지 비주얼 노벨의 성상원에 게재된 인터뷰를 재구성하여 수록한 것으로, 이번에 TYPE-MOON이 상업화 10주년을 맞이해 7월 7일, 8일엔 TYPE-MOON Fes가 개최된다는 점도 있고 하여 많은 분들이 이 인터뷰를 보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NETOCARU쪽에서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이 보아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사카우에 아키나리


나스 키노코 인터뷰 (출석자: 나스 키노코, 타케우치 타카시, 사카우에 아키나리, 무라카미 유이치)

나스 키노코
73년생. 게임 메이커 TYPE-MOON의 시나리오 라이터이며 소설가. 대표작은 월희, Fate시리즈, 공의 경계, DDD
 





 
타케우치 타카시
73년생. 게임 메이커 TYPE-MOON의 프로듀서 겸 디자이너. 나스 키노코와는 중학시절부터 지인.
 





사카우에 아키나리

문예비평가, 미니코미지 BLACK PAST, 비주얼 노벨의 성상원 책임편집. 1984년생. 유리이카, 와세다 문학 등에 기고. 2010년도 주간독서인 문예시평담당. 순문학, 라이트노벨, 비주얼노벨, 서브컬쳐가 주된 영역. jinseiburabura@hotmail.co.jp TwitterID:ssakagami

무라카미 유이치
비평가. 1984년생. 현대사상, 넷컬쳐, 캐릭터 문화론, 저서로 「고스트의 조건 클라우드를 순례하는 상상력」. 아니메루카, 유리이카 등에 기고. web스나이퍼에서 미소녀 게임의 철학을 연재중. murakami@gmail.com TwitterID:murakami_kun


2011년 현재, 비주얼 노벨을 논하는 데 있어 나스 키노코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 단언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유저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TYPE-MOON의 데뷔작인 월희에서 보여준 풍경은 비주얼 노벨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흡혈귀나 마술과 같은 서양 유래의 개념을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금 캐치하고 일본의 캐릭터 문화에 혼입시키는 수법의 색채에 우리는 말을 잃었다. 원고용지 채산 5,000장 이상에 달하는 시나리오와 총 매수 500을 넘는 그래픽을 통해 칠해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형정원에 누구나가 매료되었다.
모형정원은 그 뒤로도 펼쳐져 간다. 월희의 팬디스크인 가월십야, 서번트들의 배틀로얄을 그린 Fate/stay night, 루프란 시스템 그 자체에 물음을 되던진 Fate/hollow ataraxia, 전기소설이며 후에 유려한 영상으로도 화하는 공의 경계……이들 작품은 등장하는 캐릭터도 게임의 시스템도 다르면서도, 동시에 골격인 세계의 룰을 공유하고 있다. 나스 키노코는 시나리오 라이터이며 소설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세계를 잉태하는 자이다. 이야기의 텍스트 뿐이 아닌, 그래픽, 사운드, 시스템이라는 비주얼 노벨이 지닌 무기의 성질을 이해한 뒤에 그는 흔들림 없는 세계를 우리들의 눈 앞에 제시한다. 그의 작품에는 이상이 그려져 있다. 추하고 빈곤하고 더러운 이 현실 속에서 덮쳐오는 부의 요소 앞에 몇 번이고 무릎을 꿇으면서 그럼에도 아름다운 소원을 품고서 살아가려 하는 인간을 향한 기도이다. 그것은 맨몸의 인간인 우리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먼 이상향이다――그럼에도, 이상을 품고서 걸어 나아가는 인간의 등을 마주함으로써 그곳에 다가가고 싶다는 염원이 생겨난다. 그것은 너무나도 덧없기에 무엇보다도 고귀하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며 바란다――――수많은 찬란한 별을 낳아온 남자가, 앞으로도 고귀한 꿈과 함께 달려갈 수 있도록, 하고.중2포엠은 일기장에
본 인터뷰에선 TYPE-MOON의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활약 중이며 나스씨의 맹우이기도 한 타케우치 타카시 씨도 동석하여 이야기를 여쭐 수 있었다. 월희부터 약 10년, 비주얼 노벨의 최전선에서 싸워 온 남자들의 진지한 언어가 여기에 있다.



사카우에:먼저 기획취지를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10년 가까이 비주얼 노벨을 플레이해왔습니다만, 그중에서도 나스 씨의 작품은 멀티 엔딩이나 루프물 같은 시스템에의 비평성을 지니면서도 방대한 설정이나 세계관을 성립시키는 면이 아주 뛰어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주얼 노벨을 테마로 한 잡지를 만들려 했을 때 꼭 이야기를 여쭙고 싶었고요.

무라카미:저나 사카우에는 Fate/stay night(이하, Fate)를 플레이하고 크게 감동한 인간입니다. 이토록 재미있는 작품은 그리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Fate의 재미나 충격을 말로 하려고 하면 이게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TYPE-MOON이나 나스 씨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할 때 그 전달 방식은 2차장작과 같이 원작과 같은 노선을 타거나 혹은 사상이나 비평을 통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지선다 뿐인데, 그게 좀 불만이었습니다. 해서 이번에 저희는 그 어느 쪽도 아닌, 비평하면서도 순수히 나스 키노코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각도로 파고들어 보고자 합니다.

나스: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저나 타케우치의 최우선사항은 어떻게 해서 재밌는 작품을 유저에게 전달할까 하는 점이었는데, 그 탓에 제작자로서 밸런스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단 불안이 있다 보니 비평계의 분들과는 거리를 두었던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인터뷰는 단순히 Fate나 월희를 논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미소녀 게임의 10년에 관해 이야기하자는 거였죠. 적잖은 파문을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훈시를 남길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 해서 오늘은 자신들의 작품에 대해서 논하는 한편으로 비주얼 노벨의 10년이란 테마에도 이어질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사카우에:우선 상황확인부터 들어가자면, 일단 비주얼 노벨의 가장 기본적인 포맷으로서 멀티엔딩을 꼽을 수 있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To Heart(i)가 가장 알기 쉬운 예라고 생각하는데 복수의 히로인이 존재하고, 제각각의 엔딩을 목표로 하는 포맷은 9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죠. 동시에 2003년 이후는 CROSS†CHANNEL(ii)이나 마브러브 얼터너티브(iii)를 대표로 한 루프물이 융성했단 인상을 받습니다. 최근들어선 Steins;Gate(iv)가 대히트를 쳤고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v)(이하, 마도마기)도 마찬가지 포맷에 속하죠. 하지만 솔직히 루프물이란 것은 다른 장르로 시선을 돌려보자면 별로 새로운 테크닉도 아니고, 루프를 통한 일점돌파에 도전함으로써 이야기 내용의 정교함이 상실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네거티브한 감정을 품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해서 이야기의 내용에 강한 애착을 지닌 나스 씨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만.

나스:저는 애초부터 소설가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역시 게임성보다도 이야기성에 무게를 두는 면이 있어요. 단, 마찬가지로 젊을 적부터 게이머이기도 했기에 게임 나름의 이야기 형식을 고려하려도 했습니다. 게임이 지닌 제일가는 이점이라 하면 TRY&ERROR, 즉 루프가 가능하단 점입니다. 그건 슈팅에서도 액션에서도 어드벤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똑같은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해 실패를 극복해가요. 실제 우리의 삶에선 실패하면 즉각 죽음이니 TRY&ERROR는 성립하질 않는데 게임만이 그걸 허용하는 가상현실인 거죠. 그건 어드벤쳐 게임이란 포맷에도 직결되는 사항이고. 예를 들어 히로인이 5명 있다 치고 제각각의 루트를 만든 뒤 그것을 정리하질 않고 확산시켜버리면 멀티엔딩이 됩니다. 반대로 다원적으로 확장된 세계를 하나로 묶는 것이 루프물인 셈이에요. 이야기에 미학을 추구하는 라이터는 '의미를 포기한 확산'보단 깔끔하게 정리된 '하나의 탑'을 만들고 픈 욕구가 있는데, 그래서 한 번쯤은 루프물에 도전하는 게 아닐까요.

사카우에:멀티엔딩은 분기한 세계 전부를 정답으로 보는 포맷입니다만 그를 통일하는 그랜드 루트로의 욕망을 작가가 갖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나스:그랜드 루트나 루프물이란 것은 라이터의 가치관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의 진실을 하나로 통합하고 싶단 욕망의 발현이죠. 그게 하나의 모형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취하면 라이터도 기분이 좋고 유저도 그 세계의 진실과 마주할 수가 있고. 그리고 허구의 이야기에서 전능감과 수속감을 맛보고 유저 속에서 허구의 이야기가 영원해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앞서 다나카 로미오 씨의 CROSS†CHANNEL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건 제 취향에 딱이란 점도 있어 루프물로선 제 안에선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입니다.

사카우에:CROSS†CHANNEL은 주인공인 쿠로스 타이치가 홀로 남은 세계에서 닿을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상대를 향한 통신을 반복하고 자신의 삶을 다했기에야말로 카타르시스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스:그렇죠. 세계도 수속되었고 쿠르스 타이치란 캐릭터도 자신의 업의 청산에 들어섰죠. 그는 딱히 찬사를 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고 나쁜 면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엔딩에 도달함으로써 카르마를 해소합니다. 성악설이란 게 있습니다만 CROSS†CHANNEL에선 결코 선하지 않은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은 인간이 되고자 바라는 면이 아름다운 거거든요. 이야기 형식은 네거티브하면서도 최종적으론 포지티브한 분위기로 안착한단 밸런스가 멋집니다.

사카우에:CROSS†CHANNEL의 등장인물은 전원이 광기를 품고 있고 사회 부적응 존재입니다. 게 중에서도 가장 적응계수가 높은 「괴물」인 타이치가 동료들을 평행세계로부터 본래의 세계로 돌려보내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인간이 되었단 실감을 얻는다는, 그 구조는 아주 아름답지요.

나스:단, 자신은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여기던 타이치가 동료를 구하려 한 것 자체가 위선적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어떻게 느끼건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더라도 우리들 유저에겐 미친 자의 죽을 힘을 다한 행동이 감동을 찍어냅니다. 반복되는 나태한 나날들, Try&Error의 갈등. 그런 이야기성과 루프물로서의 기믹이 아주 제대로 맞아 떨어져 있죠. 어째서 다원적인 히로인을, 어째서 단일 존재인 주인공을 가지고, 어째서 히로인 마다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인가, 라는 어드벤쳐 게임의 최대 모순을 향한 아름다운 회답이에요.


(i) To Heart 1996년 Leaf가 발매한 PC게임. 섹스신보다도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즐거움을 중시한단 점이 획기적인 작품. 현재 미소녀 게임이란 단어가 지닌 이미지의 원점에 있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ii) CROSS†CHANNEL 다나카 로미오가 시나리오를 담당하고 2003년에 FlyingShinbe에서 발매된 작품. 어떠한 문제를 지닌 소년소녀들이 무인의 평행세계로부터의 귀환을 목표로 하는 이야기.

(iii) 마브러브 얼터너티브 2006년에 âge에서 발매되었다. 인류를 생명체로서 인식하지 않는 지구외생명체 BETA에 대해 인류가 긍지를 갖고 싸움에 임하는 열혈 SF 스토리. 혹은 「사랑과 용기의 이야기」

(iv) Steins;Gate 2009년에 Xbox360판이 5pb에서 발매되었다(PC판은 2010년에 니트로 플러스에서). 우연히 타임 리프를 가능케 하는 장치를 만들어낸 주인공 오카베 린타로가, 구하지 못한 소녀를 위해 세계선을 넘어 몸부림치는 이야기. 2011년에는 애니메이션화도 이루어졌다.
 
(v)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2011년 방영. 제작은 샤프트.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의 사회현상을 일으킨 애니메이션. 어느 소녀가 모든 마법소녀를 구하기 위해 단 하나의 희망이 되는 이야기.



『Fate/stay night』가 지향한 장소


사카우에:이번 이야기와도 관련지어 말하자면, 나스 씨의 작품 속에서도 Fate의 포맷은 한층 독특합니다. 멀티엔딩이란 형식을 남기면서도, 처음부터 모든 히로인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세이버, 린, 사쿠라란 순번으로 루트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포맷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나스:월희도 멀티엔딩을 채용했었지만 그땐 어떻게든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단 마음이 있다 보니 월식을 마지막으로 가져갔어요. 하지만 Fate는 라이터로서 더 거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단 마음이 컸죠. 단순한 멀티 엔딩 처리를 하면 각 루트의 농도가 옅어지는데 각각의 루트의 점수가 50점, 50점, 50점이란 느낌이라 날아오르질 않아요. 이 문제를 클리어하기 위해 일단은 70점짜리 루트를 만들고 다음으로 20에서 시작해 90점에 이르는 루트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40점에서 처음으로 110점이 되는 이야기를 지향하려고 했습니다. 각각 루트의 주행거리는 같지만 스타트 지점을 서서히 높여감으로써 최종지점에선 MAX를 제쳐버리고 싶었지요. 이걸 해낼 수 있다면 기나긴 이야기를 만들 의미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Fate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맨 처음의 세이버 루트란 것이 플레이어의 공통인식을 만들기 위한 기반이 되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세계의 룰과 주인공에 관한 대체적인 설명은 있지만, 어째서 에미야 시로라는 인간이 이토록 비뚤어졌는가 하는 점에 대해선 다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저 어쩐지 이 주인공 이상하다 하는 예조를 남기는 데 끝나고. 두 번째 린 루트에선 세이버 루트에서 알려진 공통인식을 전제로 깔고서 시로가 지닌 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다만 그것만으론 그가 인간으로서 망가졌단 문제까진 해결되지 않기에 마지막 사쿠라 루트에선 응용편으로 이 비뚤어진 주인공이 어떻게 하여 인간으로서 성장하는가, 허물을 벗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유저를 이야기 최종도달지점으로 이끎으로써 Fate란 이야기와 각 히로인의 매력을 논할 수가 있고 에미야 시로란 인간의 최종적인 전말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그런 생각을 했죠.

사카우에:우로부치 겐(vi) 씨의 스핀오프인 Fate/Zero에선 시로의 아버지인 에미야 키리츠구가 999명을 구하기 위해 1명을 죽이는 것은 올바르단 공리주의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Fate에서도 세이버 루트와 린 루트의 시로는 마찬가지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요. 그런데 사쿠라 루트에 접어들면 시로는 세계가 어찌 되건 눈 앞의 소녀를 사랑하고 지켜나간다는 선택을 합니다. 세계보다도 개인을 취한단 최종적인 시로의 선택에는 나스 씨 자신의 생각도 포함되어 있는 걸까요.

나스:사카우에 씨의 지적대로 세이버 루트와 린 루트라는 것은 이상을 그리는 루트에요. 이런 식으로 살고 싶다. 저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 그런 히어로가 되고픈 원망이 담겨있죠. 역시 게임인 이상 유저는 현실에선 할 수 없는 모험을 하고 싶을 테고, 거기엔 정면으로 대응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사쿠라 루트에선 이상을 맛볼 대로 맛본 유저가 현실로 돌아오는 식의 구조를 취하고 싶었거든요. 아무리 이상을 품더라도 세계라는 거대한 것은 너로선 구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명의 사람은 구하는 것 뿐이다. 라는 이야기를요. 지금까지 이상을 추구해온 에미야 시로란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던 기계가 마지막에는 인간을 구함으로써 스스로도 인간이 될 수 있단 착지점을 지향하고 싶었던거죠.

사카우에:그건 아버지인 키리츠구로부터의 탈피임과 동시에 거짓된 바램으로부터의 탈피라 할 수 있겠군요.

나스:그렇죠. 반면 두 번째 루트에서 쓰고 싶었던 건, 설령 자기 자신이 가짜이더라도 바램 자체가 올바르다면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는 거였습니다. 한 편으로 세 번째 루트에선 꿈꾸는 시기를 지나 어른이 된 소년이 무엇을 지키는가, 무엇을 소중히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사람에 따라선 그것을 영웅이었던 남자가 단순한 인간으로 타락한 이야기라고 읽을지도 모르지요. 사쿠라 루트에서 마음 들뜨는 모험담을 원했던 유저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기선 역시 18금이고 어른이 즐기는 게임으로서 최후엔 한 단계 더 높은 오락을 보이고 싶단 마음이었죠. 두 가지 가치관을 제시해서 유저가 믿는 쪽을 소중히 해줬음 한다는 식으로.

타케우치:우리가 제작에 들이는 시간과 유저분이 실제로 플레이하는 시간이 어긋난단 문제도 있습니다. 제작자인 나스는 시간을 들여서 지향점을 높이 가져가지만 유저분은 60시간 근처 동안 단번에 플레이해버리니 모티베이션의 변화에 따라갈 수가 없을 거라 느끼는 면이 있었죠. 저희들은 린 루트까지 완성한 단계에서 사쿠라 루트의 시나리오를 읽고 "쩐다!" 하고 생각했지만, 린 루트의 속편이 되어줄 만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유저분도 적잖았죠. 시간을 들여 게임을 바짝 졸여가는 점의 문제점이 거기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유저분이 이해하질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 나스에겐 일종의 좌절감으로 와 닿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스:그런 거 말해도 되나? (웃음) 확실히 게임제작은 길어요. Fate로 말할 것 같으면 각각의 루트 자체는 쓱쓱 써나가도 한 개 루트당 문고본 네 권 정도 분량이 있기 때문에 결국 간격이 생길 수밖엔 없고, 텐션도 달라지죠. 각본이 완성된 다음엔 그래픽커나 연출가, 음악가들이랑 회의하느라 수개월 스톱되고.

타케우치:제작기간의 장기화는 여러모로 골치 아픈 문제지요. 짧으면 좋겠지만……좋든 나쁘든 제작진도 변화해가니까요.

나스:쓰는 와중에 자기자신의 가치관도 성장하거든요. 그건 자신에게 있어선 좋은 일이지만 유저와의 괴리가 발생한단 점도 분명 있습니다. 타케우치 군은 좌절감이라고 했지만 당시 제가 느낀 건 판매방식을 잘못했다는 거였습니다. 쓰르라미 울 적에(vii) 분할 전략을 취한 걸 보고, 이거 였으면 작가와 독자가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됐을 텐데 싶었죠.

무라카미:제작진과 유저가 시간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요.

나스:라이터에게 하나의 작품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모형정원과 같은 세계라는 것은 일종의 동경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고취하게 되면 시대착오의 우라시마 타로가 돼버리거든요. 거기가 라이터로서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겠네요.

타케우치:요즘 들어 유저도 이야기를 재워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마도마기 최종회를 일거에 방송해버렸는데, 저는 사이에 일주일 있었음 했어요.

사카우에:방송까지 3주일 가까이 간격이 생긴다는 건 애니메이션 쪽에선 특수한 케이스였죠.

나스:토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3월 11일에, 이거 마도마기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방송되질 않았죠. 하지만 어떻게든 다음 화를 보고 싶어서 우로부치 겐 씨한테 "지금부터 거기로 가도 돼?" 하고 전화해서 억지로 봤습니다 (웃음) 거기서 이 10화를 방영하지 못하는 건 애니메이션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의미로 9화까지 마도마기를 즐겨온 유저에 대한 대답이었으니까요. 그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이고, 무엇을 지향하고, 어디로 향하는가―――그걸 제시하는 회였으니까요. 다만 결과적으로 마도마기의 방영이 연기된 건 플러스가 됐습니다. 유저의 성원을 받고서 제작 스태프가 한층 퀄리티업을 이룰 수 있었던 점, 지진이 남기고 간 상처 속에서 희망을 갈구하고 있던 유저를 향한 성원이 된 점. 이 타이밍에서 마도마기는 방영되어야 했던 거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앞서 제작 측과 유저분과의 어긋남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오자면, 전자가 바라는 타이밍과 후자가 보는 타이밍이 일치할지 어떨지는 그야말로 하늘에 달린 일이구나 하고.

사카우에:게임을 제작하는 기간엔 세이버 루트를 쓰고나서 한숨 돌린 다음에 다음 루트를 쓸것 같습니다만 유저 대다수는 "좋아, 이 텐션 그대로 린 루트로 간다!" 하고 플레이하지요. 그 부분의 타임레그를 공유할 수 없단 문제가 있는 건가 싶습니다.

나스:정말로 뛰어난 라이터 분이라면 쓰는 동안 자신의 사상이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한 개 작품을 쓰는 동안은 한 개 사상으로 굳힐 거라 봅니다. 하지만 저는 미숙했기 때문에 '쓰면서 점점 재밌게 해버리면 되잖아.' 하고 생각했어요. 세이버 루트의 가치관만으로 한 개의 작품을 만드는 것도 물론 정답이긴 합니다. 하지만 제작과정에서 '다음 루트에선 이전 루트보다 윗단계를 지향하자.'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야말로 Fate는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이 된 것 아닐까요.

사카우에:Fate가 대단한 점이 뭔고 하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사상이나 행동에 흔들림이 없으면서도 공략순을 고정함으로써 그걸 하나의 성장 스토리로 패키징한 점입니다.

무라카미:세이버 루트와 린 루트는 같은 방향성이 있으니까 링크시키기도 용이했다고 봅니다. 그만큼 사쿠라 루트로 접어들었을 때의 방향성 차이에 놀란 유저도 잔뜩 있었을 테고요.

나스:말씀하시는대로 세이버 루트와 린 루트를 쓰던 단계에서 제 가치관은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린 루트를 마칠 무렵에서 가치관이 변화한 부분도 있고, 코스트나 예산 한계도 슬슬 보이기 시작했고요. 처음에 상정했던 이리야 루트가 실현 불가능이란 것도 알게 됩니다. Fate는 2004년 초에 발매했습니다만 당초 예정대로 4 루트를 하려고 하면 시나리오만으로도 여름 이후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제 쪽에서 두 루트를 하나로 합치고 싶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본래는 사쿠라 루트에 앞서 이리야 루트가 들어가고, 좀 더 매끄럽게 변화할 예정이었던 거지요. 다만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유저를 오랜 기간 기다리게 하는 이상에야, 이상에 죽고 사는 이야기와는 별도의 무언가를 사쿠라 루트 쪽에서 그리지 않으면 제쪽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유저 측에서 방향성에 대한 이견이 나올 거란 예감이 있었지만 거기선 저희의 좌우명인 '재미만 있으면 OK'란 말씀을 꺼내 들어 유저를 믿어봤습니다. 구체적으로 의식한 점은 이제 배틀로얄은 그만하잔 점이랄까요. 세 번째 루트는 다른 색깔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스태프 사이에서도 느낄 수 있었거든요. 거기서 미스테리 풍미의 이야기로 가자고 했더니 스태프가 재밌어해 줬습니다. 제작 스태프 전원이 재미있어하는……그 점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게임은 만들 수 없으니까요. 소설이야 재미가 없으면 나스 키노코란 개인의 책임에서 그칩니다만 게임은 그렇지가 않아요. 10명 이상의 스태프가 몇 년을 들여 만든 물건이 재미없다, 그런 결말은 용납될 수 없죠. 그러니 스태프 전원이 납득할만한 설계도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카우에:확실히 사쿠라 루트는 그태까지의 Fate와는 이미지가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적이 된 세이버를 시로가 찌르지 않으면 안 된단 발상이 엄청나죠. 대부분은 여기서 배드 엔딩을 볼 겁니다 (웃음) 그 밖에도 시로가 아닌 린이 보석검 젤렛치(viii)를 휘둘러 사쿠라를 압도한단 조금 각도가 다른 연출이 멋졌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저는 라이더의 보구인 벨레레폰과 세이버의 엑스칼리버가 맞부딪히는 신에 감동했죠. 여태까지 루트에선 적이었던 라이더가 같은 편이고 같은 편이었던 세이버와 싸우는 구도는 첫 번재 루트에서의 대결의 리플레인을 일으키는데다, 격돌 그 자체의 스케일도 거대하고. 이건 정말 엄청난 서비스구나 하고 눈물이 다 났습니다.

타케우치:사쿠라 루트는 벌이는 스케일은 루트 통틀어서 제일 화려한데도 인상은 수수하게 준 것 같아요. 테마가 난해한 거랑 히로인이 수수하단 점 때문인 것 같긴 한데.

나스:사쿠라 루트의 후일담에 너무 기교를 부렸던 감이 있어서 그 부분은 보다 스트레이트 하게 해야 했다고 지금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사카우에:사쿠라 루트는 순수한 해피 엔딩이란 느낌은 안 들죠. 다른 작품도 포함해 나스 씨는 해피 엔딩이란 개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스:그 점은 굉장히 심플합니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결정하고 등장인물이 이 테마대로 움직인다면 최종적으론 이렇게 될 것이라 이미지합니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사실 사쿠라 루트는 노멀 엔드가 타당한 끝맺음이라고 처음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플롯 단계에선 노멀 엔드가 트루 엔드였죠.

사카우에:노멀이라면 사쿠라가 돌아오지 않는 시로를 할머니가 되어서도 쭉 기다리는 엔딩이지요.

나스:그렇습니다. 당시는 그것밖엔 상정하질 않았는데, 3분의 2 정도 썼을 무렵에 나스 키노코의 욕망과는 별도로 이야기 자체가 이 마무리를 용납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라스트신까지 써보고 거기서 미리 상정한 엔딩으로 할지 이야기의 흐름대로 해피 엔드로 할지를 결정하기로 했죠. 결국, 이건 시로가 여러 가지를 잃어버린 뒤 인간적인 행복을 얻는 이야기니까 세이버나 이리야가 사라지게 되더라도 사쿠라는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싶은 부분에서 착지했습니다. 그녀는 간접적이라곤 해도 대량살인을 저질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복해져선 안된다는 건 이상하다, 살아있는 한 죄를 갚아나가면서도 그와 동시에 행복해져도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게 위선으로 비친다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그것을 갈망하고 있다고 강렬하게 느꼈거든요. 솔직히 말해 제가 쓴 이야기의 (무언의) 압력에 패배하는 건 처음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사카우에:나스 키노코 월드의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후회하질 않죠. 월희에서 알퀘이드와 헤어진 토오노 시키나 Fate에서 세이버가 사라진 이후의 시로나 기본적으로 미련없이 앞만 보며 살아갑니다. 영속적으로 이어지는 관계성보다도 함께 보낸 시간이 짧고 결과적으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서로가 납득할만한 관계를 쌓을 수 있다면 저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미지로 그려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나스:감사합니다. 사카우에 씨의 말을 듣고 지금 막 몸에 전류가 찌릿한 기분입니다 (웃음) 분명 그들이 후회하지 않는 것은 후회한 순간, 그태껏 얻은 것이 거짓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일 테죠. 알퀘이드와 시키를 보나 세이버와 시로를 보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의 만남을 하고서, 그것을 찬란한 별이라 여길 수 있다면, 그 이별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슬퍼해선 안 되며,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저 너머에서 별빛에 지지 않을 만큼의 무언가를 얻을 수 있도록――설령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나스 키노코란 인간이 그리는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입니다.

무라카미:Fate의 린 루트=Unlimited Blade Works가 그 생각이 반영된 이야기죠. 시로가 아쳐와 싸우는 신에서 자신이 가짜더라도 이상은 가짜가 아니야, 그렇기에 돌이키는 짓 따위 하지 않아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데, 거기에 쓰인 바와 일치하는 의지를 나스 씨도 품고 계시단 걸 알게 되니 순수하게 감동하게 되네요. 얼핏 그 의지는 사쿠라 루트에서 반전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일관된 거라 생각합니다. 그건 시로의 이야기를 앙그라 마이뉴(ix)의 이야기에 겹쳐보고 있기 때문인데, 세이버 루트나 린 루트에 있어선 앙그라 마이뉴가 성배이기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고, 그 대신 시로가 고생하고 있단 인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표면으로 올라온 루트로서 앙그라 마이뉴가 전면에 나올 수 있게 된 단계인 사쿠라 루트, 나아가서는 Fate/hollow ataraxia(이하, hollow)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쿠라 루트의 라스트신은 죽은 시로의 영혼을 인형에 넣음으로써 인간으로 부활시킨다는 구성입니다만, 앞서 허물을 벗는단 표현을 쓰신 점을 돌이켜보면 거기에 나스씨의 무의식이 작용한 건 아닐까 싶네요.


(vi) 우로부치 겐 니트로 플러스 소속의 시나리오 라이터이며, 마법소녀☆마도카 마기카의 각본담당이기도 하다. 게임 시나리오에선 Phantom, 귀곡가 사야의 노래 등의 시나리오를 맡았다. 나스 키노코 씨의 맹우이며 Fate의 스핀오프 작으로 본편에선 풀어내지 못한 제4차 성배 전쟁의 진실을 그린 Fate/Zero를 집필했다.

(vii) 쓰르라미 울 적에 용기사07 주최 서클 07th Expantion에서 2002년부터 계 8회 릴리스한 작품. 동인 게임이면서도 점점 인기가 높아지다 브레이크. 애니메이션, 만화, 소설 등으로 미디어 믹스 되고 있다. 미스테리이며 호러이며 무엇보다 신뢰의 이야기.

(viii) 보석검 젤렛치 현존하는 다섯 마법사 중 하나, 키슈아 젤렛치 슈바인오그가 만든 마술 예장. 제2법의 행사를 가능케 하며 한때 달 낙하마저도 저지하였다고 전해진다. 토오사카 가문에 설계도만이 전해지며 그것을 린이 실용화에 성공. 무제한의 마력을 지닌 여동생을 상대로 언니는 무진장의 마력을 평행세계로부터 이끌어내어 성불시켜버린다.

(ix) 앙그라 마이뉴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상징하는 영령. Fate 본편으로부터 70년 전에 일어난 제3차 성배전쟁에 있어 성배에 흡수된 결과, 성배의 기능을 비뚤어뜨렸다. 본편의 제5차 성배전쟁에선 그릇인 성배가 파괴됨으로써 소멸할 예정이었으나, 바제트 플라가 마크레미츠의 죽고 싶지 않다는 소원을 성취한 결과, 그녀만의 성배로서 한때 간의 행복한 세계를 창조해내었다. 그것이 hollow의 세계이며 앙그라 마이뉴는 거기서 어벤져 클래스가 되었다.



낙원 저편에 드러나는 것―『Fate/hollow ataraxia』,「Realta Nua」

사카우에:무라카미 군이 hollow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그건 여러 의미에서 해석하기 난해한 작품이지요.

나스:앞에서도 타케우치가 말했다시피 사쿠라 루트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제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답이나 리벤지적인 의미도 담긴 작품이에요. 유저로부터 "팬디스크 희망!"의 목소리가 예상 이상으로 많아서, 그럼 팬디스크를 만들자는 말이 나왔을 무렵. 단순한 후일담은 만들기 싫었습니다. 월희의 팬디스크인 가월십야는 일상의 단편을 그려 팬디스크가 영원히 계속될 거라 생각하게 한 뒤, "그래도 끝은 있어요, 축제는 끝난다고요." 하는 구성으로 만들었죠. 하지만 그걸 이미 해버린 덕에 막상 Fate의 팬디스크를 만들자니 똑같은 테마는 쓸 수가 없고. 그래도 유저가 이 정도로 사랑해 준 이상 내지 않을 순 없다는 딜레마에 줄곧 고심했죠. 그렇게 고민을 거듭한 결과 한가지 하지 못한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앙그라 마이뉴를 묘사하지 못한 거죠. 동시에 hollow란 작품 자체가 팬디스크의 완성형이면서도 팬디스크를 부정하는 이중구조로 만들 수 있다면야 해 볼 가치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1년 반이나 걸린 건 예상 밖이었지만 (웃음) 하지만, 초기 컨셉을 관철한 혼신의 작품이라 생각했더니 의외로 '팬디스크의 결정판이자 부정'이란 컨셉이 전해지질 않았어요. 사실 이거야말로 나스 키노코에게 있어서의 최대의 좌절이라, 그로부터 1년간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질 않아요. 그만큼이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 컸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타케우치:hollow의 기획 회의 때 시로가 나오지 않는단 말을 들었을 땐 깜짝 놀랐죠.

사카우에:기본적으로 바제트나 시로로 의태한 어벤져 시점이고 시로 본인은 마지막에 살짝 나올 뿐이니까요.

무라카미:실제로 hollow는 상당히 임팩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벤져와 바제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뱅글뱅글 회전한 결과, 최종적으론 한쪽이 소멸해버리는 이야기니까요.

나스:게임인 이상 재밌는 아이디어를 담아보자는 의욕이 있었죠. 예를 들어 실질적인 최종보스인 앙그라 마이뉴에게 스타트 직전부터 만나러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이길 수 없죠. 하지만 조금 플레이해서 그래픽룸에 가보면 천칭 모양을 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고 거기에 CG가 채워져 가는 것이 보입니다. 「결락이 있는 한, 이 세계는 쭉 회전한다」 라고 앙그라 마이뉴는 시간 날 때마다 말합니다. 거기서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벤트를 전부 보지 않으면 앙그라 마이뉴를 타도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죠. 요는 모든 가능성을 꺼버려야만 이 세계와 작별을 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시스템을 통해서도 전달하려는 거였습니다. 90년대 전반까지 18금 게임은 이야기를 즐기기보다 CG를 메우기 위해 플레이 된 감이 있습니다. CG를 컴플리트 하지 않으면 다들 뒷맛이 찝찝해 그만두질 못하죠. 하지만 세계의 끝을 알게 된다는 건 그 세계를 죽이고, 다음 세계=신작 게임으로 무자비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나 정열을 불사르며 컴플리트한 게임은 그 순간에 잊혀 사라지죠. 제가 hollow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을 알고서 하나의 세계에 영원히 머무를지 아니면 나아갈지를 선택하게 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앙그라 마이뉴가 생각하는 정답은 후자죠. 세계를 먹어치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조 없는 짓이 아니며,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그것의 반복이기에 가슴을 펴고 먹어치워 가라, 라는 게 그가 전하고 싶었던 바입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바제트와 등을 마주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건 「추억을 영원으로 하려하지 마라, 언제나 그것은 갱신되어 가는 것이니 자신의 삶의 방식에 움츠러들지 마라」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 마무리를 가지고 흔히 「골방에 처박혀 있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라」적인 결말이란 소릴 듣습니다만 완전히 반대라고 해야 하나……오타쿠면 뭐 어때, 「세상을 등지고 골방에 처박혀라」 같은, 너네들 죽을 때까지 게임을 해라란 의미죠 (웃음) 너희들이 계속하는 한은 우리들도 영원히 세계를 만들 테니까, 라는 뜻을 발신하고 싶었습니다.
무라카미:hollow에선 이리야의 존재도 중요하단 느낌입니다. 나스 씨의 작품에선 누님 캐릭터가 강할 때가 잦은데, 이리야는 시로에게 있어선 누나이기도 하고 여동생이기도 한 특수한 존재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돌출된 모성과 같은 것도 지니고 있죠. 그게 가장 잘 드러난 것이 holoow의 라스트 부근에서 어벤져를 보낼 적에 「당신은 가엾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거네, 하지만 정 가겠다면 어쩔 수 없지」란 대사를 발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이 Fate의 사쿠라 루트를 보완하는 듯한 흐름이 돼서 한층 이리야란 캐릭터의 심오함을 느꼈습니다. 그 부근에 대해 나스 씨는 어디까지 상정하셨었는지.

나스:Fate 무렵엔 누나이기도 하고 여동생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렬하게 의식했었죠. 그게 hollow에 와서는 이야기 속에서 예외적으로 어벤져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보낼 수밖엔 없는 포지션에 카렌과 이리야가 존재하는 거고. 그 두 사람은 영원의 낙원을 바깓 쪽에서 부감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보답 받지 못할 인생을 보낸 어벤져가 스스로의 의지로 낙원을 떠나려 할 때에 머물러도 된다며 말리고 싶지만, 본인이 고른 선택을 존중하려 하지요. 그런 의미에선 정말로 모친적인 존재가 되겠지요. Fate 시절엔 이런 모성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았습니다만. 다만 Fate에서도 마지막에 막을 내리는 것은 이리야이고, 그녀의 육체를 써서 시로가 전생하는 이야기가 되어, 결과적으로 모성적인 부분을 담당하고는 있네요.

무라카미:앙그라 마이뉴의 이미지가 태아라는 점 탓에 한층 hollow에서 이리야의 모성이 돋보이는 부분도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팬디스크와는 조금 다릅니다만 PS2용의 소프트로 『Fate/stay night[Realta Nua]』 (이하 Realta)가 나왔을 때 라스트 에피소드가 추가됐었죠. 아쳐가 이상을 걸어간 끝에 세이버와 재회한다는 건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무언가를 얻어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나스 씨의 마음이 반영된 걸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나스:당시 Realta 제작이 결정되었을 때 타케우치가 플레이스테이션 판 특전을 붙이자고 제안했었죠. "거기서 더이상 붙일 거 없어, 봐주셈." 이랬더니 그가 "세이버 루트의 트루 엔드를 만드는 거야!"는 말을 해서 하루 종일 싸웠죠 (웃음) 저로서는 "뭔 소리야! 그 세이버 엔드를 더럽힐 셈!?"이란 기분이 있어서요. 그래도 유저가 그걸 바라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타케우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본편의 축이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정의의 사도에게 상을 주는 결말을 고안한 결과인 거죠. 라스트 에피소드의 첫 타이틀이 「Robot man」입니다만, 시로는 오즈의 마법사로 치자면 양철나무꾼에 해당하는 존재거든요. 그런 양철나무꾼이 인간이 된다는 형태로 Fate는 끝을 맺습니다만 로봇처럼, 프로그램적으로 이상을 추구한 인간의 기쁨을 저버린 남자가 그 삶의 방식을 사랑해주는 존재로 인해 사후인간(死後人間)이 될 수도 있다…는 식이라면 Fate로서 성립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타케우치:Realta에서 Fate의 세계를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펼치게 되었을 때 굉장히 높은 모티베이션으로 도전했었죠.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이식을 하려고 마음먹고 대폭으로 CG를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Fate라는 이야기에 완전한 엔드 마크를 찍으려거든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궁리했을 때 역시 세이버의 트루 엔드가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건 동시에 이제 그만 Fate에서 벗어나자는 결의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나스:그 시절엔 하나의 작품을 이렇게 끄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하지만 hollow의 좌절감에서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일평생 끌어안고 갈 작품이 있어도 괜찮지 않겠느냔 식으로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로부치 씨에게서 자주 "Fate는 사자에상이 되면 되잖아."란 소릴 듣거든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계속되는 거니까."라고 하더군요. 그건 좀이라고 했더니 "나는 그 모티베이션으로 Fate/Zero를 쓸 거니깐."이란 말을 들어서 "그러십니까-"라고 밖엔 대답할 수가 없더군요 (웃음) 이전까지 전 한가지 작품과 오랫동안 부대끼는 게 싫었습니다만 2008년 무렵부턴 계속할 수 있는 동안은 계속하는 것도 좋겠단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단, 그건 Fate/stay night Ver.2를 내거나 CG나 캐릭터를 단순 추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Fate라는 세계관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겠단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야 말로입니다. 건담 같은 밈을 상정해 성립하는 이상이죠. 신작도 물론 내겠지만 러브콜을 받는 한은 Fate란 세계를 회전시키려 합니다.

타케우치:우로부치 씨는 그걸 굉장히 빠른 단계에서 말했지. 아메리칸 코믹스로 해버리면 되잖아, 하고.

나스:난 그 사람이 하는 소리를 잘 못 알아듣겠단 말이지. 그 남자는 큐베니까 (웃음) 역시 큐베를 이해하는 건 인간인 나에겐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지만, 2008년 즈음해서 "당신이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어. 나도 마법소녀가 될게!" 하는 노선으로 나아갔습니다.


나스 키노코의 세계관――IF를 내포한 모형정원, 감성과 이성, 망가진 주인공

사카우에:TYPE-MOON이란 브랜드가 특별한 건 제작 스태프가 지닌 작품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스트레이트하게 유저에게도 와 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걸 처음으로 느낀 건 2001년의 만다라케의 인터뷰에서 나스씨와 타케우치씨의 에피소드가 중학 시절부터 이어져 왔단 걸 읽었을 때입니다만.

나스:우와, 젊은 시절이다 (웃음)

사카우에:그것 말고도 「월희통신」에서 월희 제작 에피소드를 읽고 굉장한 열정을 기울이고 있단 사실이 전해지기도 했고요. 그걸 받아들이다시피 해서 여러 출판사로부터 앤솔로지나 무크가 나오고, 거기서 그리던 사사키 쇼넨 씨가 나중에 만화판 월희의 작화를 담당하기도 했죠. 이러한 2차 창작적인 측면도 포함해 TYPE-MOON의 브랜드 이미지가 쌓아올려 진 것 같습니다.

무라카미:저도 2000년 말에 월희가 나오고부터 TYPE-MOON 작품이나 그 2차 창작을 탐닉하고 있었습니다만 2004년에 Fate가 나와 한가지 생각하는 바가 있었거든요. Fate에선 자신의 이상을 향해 전진하란 메시지를 발하는 한편으로 무시간적인 존재인 서번트가 모형정원처럼 존재하고, 여기로 가면 모두가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Fate의 동인지를 살펴보면 아바론 같은 장소에 영령들이 떠들썩하게 모여있다가 「불렸으니까 잠깐 다녀올게!」 하는 식으로 소환되는 이야기가 많았고요. 그걸 고려해보면 소비자는 2차 창작적인 모형정원을 즐기려는 부분이 크고, 그게 앞서 나스 씨와 타케우치 씨가 품은 위화감과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스:다른 집필자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강렬한 마무리가 기다리는 모형정원 쪽이 안심이 됩니다. 끝이 있다면 모형정원 속에서 뭘 해도 OK. 그리고 끝이있으니까 안타까움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가 있는 거고.

타케우치:저는 반대네요. 나스가 쓰는 작품의 경우 이야기가 끝나도 작품이 죽지 않는단 인상을 받거든요. 그건 나스가 처음부터 죽음까지 포함해서 이야기를 설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월희나 Fate는 이야기 속에 IF가 대량으로 내장되어 있어서 이야기가 끝나도 유저분은 여러 가지를 상상할 수 있죠. TYPE-MOON의 2차 창작이 유행한 가장 큰 까닭엔 틀림없이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 봅니다. 하지만 끝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그만큼 강렬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니, 그런 면의 컨트롤이 되는 게 나스의 매력이죠.

사카우에:나스 씨의 이야기는 단발성이 아닙니다. 세계관이 조금씩 겹쳐있어요. 그건 이야기로서도 재미있고 전략적으로도 강점입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지만 과거의 작품과 공통된 세계관이 있으니 영령을 불러내듯 과거 작의 캐릭터에게 다시 한 번 숨결을 부여할 수도 있죠. 그건 2차 창작적으로 굉장히 개방적인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아넨엘베의 하루처럼 올스타 집결 작품이 가능한 것도 그 탓이겠죠.

나스:현재 거대한 월드, 거대한 모형정원 역할을 수행하는 건 월희와 Fate뿐입니다만 신작인 마법사의 밤은 이 두 작품에서도 기반이 되는 물건입니다. 마법사의 밤이란 세계에서 둘이 태어난 거죠. 이 세 세력을 내포시키면 한층 거대한 모형정원으로 TYPE-MOON의 이미지가 확립될 겁니다. 그리고 이 모형정원엔 공통된 확고한 룰이 있지요. 이 세계가 가지고 놀기 좋은 건 그러한 기반에 대한 공통인식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무라카미:타케우치씨는 흔히 "나스는 TRPG(x)를 좋아해서, 스스로 설계까지 하는 남자다."라고 하시던데, 지금 이야기는 그런 면을 잘 표현하지 싶네요. 규칙, 기초설계, 캐릭터와 그 동작방식을 설정하고 그에 준해 개별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단 인상입니다. 이런 면은 의도적이신 건가요?

나스:의도는 하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철저히 따지고 보는 편은 아닙니다. 월드설정이랑 캐릭터 설정, 그리고 테마를 정하는 것. 여기까진 계산합니다만 그 이후에 플롯을 생각할 시기엔 반쯤은 감성으로 쓰죠. 저는 역시 감성에 의존하는 작가라 생각합니다. 덕택에 어느 작품을 쓰던지 작가의 색이란 게 알기 쉽게 배어나요. 반대로 우로부치 씨는 철저하게 계산적인 작가에요. 우린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그건 집필자로서의 스타일이 정반대라서거든요. 서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한편으로 프랑스 요리랑 중화요리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는 의식이 있으니까 격돌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분 좋게 사귈 수 있죠. 마도마기가 시작하기 전에 하가네야 진 씨가 굉장한 소릴 했거든요. "우로부치 씨는 기본적으로 곤충이다." 하고. "곤충!?" 하고 물었더니, "인간의 감정을 이해는 하지만 자신 속에는 두지 않아. 저 남자는 그런 시스템인 거다. ―――참으로 무서운 남자야." 하던데 (웃음) 반쯤 웃자고 하는 소리였지만 지금 와선 알 것 같습니다. 계산적으로 쓴다는 것은 자기 안에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거거든요. 저는 아무리 계산적이려 노력해도 마지막에는 감성에 씌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느 작품도 컬러링은 똑같은 거죠. 나스 키노코의 작품을 좋아해 주는 사람은 그 컬러링을 좋아하는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맞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이쪽으로 들어올 수 없죠. 월희나 Fate가 국지집중형 인기인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저나 타케우치는 나스 키노코란 라이터가 대중에게 먹힐 스타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혼의 컬러링이 비슷한 사람만을 MAX로 즐겁게 해주는 장치 같은 거라 생각합니다.

사카우에:나스 씨의 세계관, 컬러링에 특징을 부여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망가진 주인공이란 요소가 항상 중시된 기분이 듭니다. 월희의 시키는 생물이나 물질의 죽음을 보는 인간이고, Fate의 시로도 삶의 방식 그 자체가 어긋나있죠. 그런 모티브는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 걸까요,

나스:그건 저나 타케우치가 태어난 연도에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저희는 버블기 조금 전, 일본이 성장을 계속하는 와중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시대에 태어났죠. 그래서 우리는 딱히 고생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아버지 세대가 고생했죠. 그런 부모를 보며 자라나면 자신이 아무런 고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부끄러워집니다. 그저 평화로워져 가는 나라에 있어 세계와 마주하려거든 자기자신에게 당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쭉 있어서 정상인 걸 가지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런 게 자신의 밑바닥에 깔려 있으니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도 무언가의 결손이나 컴플렉스가 없으면 세계와 대치시킬 수 없단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무라카미:DDD는 그게 전면화한 인상입니다.

나스:그렇죠. 애초에 DDD는 hollow와 링크시킬 예정이었습니다만 후자에 너무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할 수 없었습니다. 해서 테마를 완전히 분리해서 hollow에선 게임으로서 할 수 있는 사항을 하는 한편, DDD에선 당시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바를 모조리 전하잔 의도로 집필했습니다. DDD는 공의 경계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취향을 완전전개한 소설이라 특히나 그런 부분이 강하지 않나 싶습니다.

무라카미:예를 들어 Fate에서 시로는 물건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만 그건 그의 능력의 본질이 아니죠. 애초에 고친다는 건 이상해진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 세계에서 정상적인 건 하나도 없고 모든 게 이상하니까 수리가 아니라 적당히 손질하며 조정해갈 수밖엔 없다. 그런 주장이 DDD의 주인공 이시즈에 아리카가 카료우 카이에의 의수 정비를 행하는 신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나스:감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읽어주시니 굉장히 기쁩니다.

사카우에:hollow와 DDD와 같은, 작업이 동시진행 되던 것들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전체적으로 게임의 시나리오를 쓸 때와 소설을 쓸 때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란 의식을 갖게 되나요?

나스:그렇죠. 다른 작업이 됩니다. 앞서 자신의 작풍은 대중 지향적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비주얼 노벨일 경우는 10만 인부터 20만 인의 유저를 대상으로 판매하는 물건이다 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유저가 바라는 것을 믹스해가며 만듭니다. 그에 반해 소설은 자신의 욕망이 최우선사항이죠. 여유가 있으면 지금의 독자가 기뻐할 만한 요소도 넣어보자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씁니다.

사카우에:나스 씨 세계관 관련으로 또 한가지 여쭙고 싶습니다만 예전 콤프티크에서 Tactics의 ONE(xi)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었죠. 저는 지금도 그게 신기한데, 기적이나 초월성이란 중요한 테마에 대한 사고방식이 나스 씨와 마에다 준(xii) 씨랑은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나스:아, 그렇죠. 확실히 테마는 반대가 되겠지요.

사카우에:마에다 씨가 그리는 기적이라는 건 무조건적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겁니다. 개인 레벨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상이 있는 국면에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해서 모든 것을 구제로 이끄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나스 씨는 기적을 이룰터인 성배를 사악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으로 묘사합니다.

나스:key작품의 기적은 전능하며 이야기가 갈구하는 장치란 기분이 듭니다. 고통받은 자에게 그 고통을 넘어설 만큼의 행복을, 이라는. 반면, 저는 고통과 행복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집필자의 방향성 문제인 거겠죠. 월희나 Fate나 어딘가에선 구할 수 없는 것, 이룰 수 없는 것이 생깁니다. 그런 큰 가치관의 차이가 아닐까요. 그와는 별개로 마에다 씨가 쓰는 일상 이야기는 재밌습니다. 그 개그 센스는 틀림없는 인류의 보물이죠. 하지만 제가 ONE에서 가장 감명을 받은 건 게임으로서의 패키지 부분입니다. 당시 저는 PC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어드벤쳐 게임의 체험이 제절초(xii)에서 멈춰있었습니다. 그러다가 PS판 ONE이 나왔을 적의 패미통 리뷰에서 「SF로서는 평범할지도 모르지만 빛나는 면모가 있다」라는 문장을 읽었거든요. 거기다 히로인 중 한명인 나나세 루미의 성우가 요코야마 치사(xiv) 씨였죠. "치사 씨인가. 살 수밖에 없구만." 하고 생각했습니다 (웃음) 그렇게 실제로 플레이해보니 제절초 포맷이면서 미소녀 게임으로서도 완성이 되어있었죠.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이런 게 OK라면 나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타케우치:하지만 PS판 밖엔 안 했지.

나스:그래, 그거 가지고 타케우치 군하고 논쟁이 일어났거든요. "PS판 하고 있어? 똥이네, ONE은 PC판만이 진실. 나머지는 흑역사." 이랬거든요. 그래서 PC판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텍스트 박스 형식에다 보이스가 없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고요. 해서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자네는. 후쿠야마 사치야말로 진실의 빛." 이라며 종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아, 아무래도 좋지요, 이런 이야기. 실례했습니다 (웃음)

무라카미:ONE과의 만남은 상당 부분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거군요. 시스템 면에서 충격을 받았단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으실지.

나스:일단 사토무라 아카네의 스토리가 감명 깊었죠. 아무리 기다려도 그리는 사람이 오지 않는단 장면의 텍스트 표시가 문장적으로 아름다웠어요. 거기서 느낀 게 비주얼 노벨은 문자의 밸런스와 연출의 타이밍까지 합해서 하나의 그림이 성립하는 물건이라는 점입니다. 단지 문장을 흘려보내는 것만이 아니기에 아름답다. 한 화면마다 유저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맛볼 수 있을 만한, 그런 밸런스를 고려하지 해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월희 시절엔 스스로 스크립트도 짰는데 당시 연출엔 그런 의식도 들어가있습니다. 붉은 문자를 넣거나 화면 아랫부분에만 문자를 출력하는 방식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크리에이터 나름대로 온 힘을 쥐어짜 낸 연출이었죠. Fate에 접어들고서부턴 엄청난 영상 센스를 지닌 남자가 들어온 덕에 제 시대는 끝나버렸습니다만 (웃음) 그때부턴 문자를 어떻게 표시할 것인가에 대한 승부를 할 필요가 없어져서 순수하게 그림에 맞는 텍스트를 쓰는 것만을 최우선사항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 틈만 나면 문자표기에 대한 기교도 섞어가고 있습니다.


(x) TRPG 테이블 롤 플레잉 게임의 약칭. 본문에서 언급된 D&D, T&T도 TRPG에 속한다.

(xi) ONE PC판은 1998년에 발매. 스태프 대부분이 후의 key 브랜드로 이적했기 때문에 key 작품과 한데 묶어 취급하는 경우도 많다. To Heart와 마찬가지 학원생활을 무대로 한 포근한 연애 스토리인가 싶더니 일상이 언젠간 끝나버릴지도 모르는,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불안감의 구현화로서 「영원의 세계」가 등장해 주인공 오리하라 코우헤이는 현실세계에서 한 번 사라져버린다는 상실을 그린 이야기이다. "영원은 있어, 여기에 있어." 란 미즈카의 주문은 비주얼 노벨 역사에 남을 명대사.

(xii) 마에다 준 비주얼 아츠 브랜드인 key 소속 시나리오 라이터. key 인기의 최대공헌자이며 관련된 작품은 MOON, ONE, kanon, AIR, CLANNAD, 리틀버스터즈! 등. 일본을 대표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중 하나이나 key 최신작 Rewrite에선 시나리오 집필을 하지 않고 QC(퀄리티 컨트롤)을 담당했다. 작사가, 작곡가로서도 활약.

(xiii) 제절초 1992년에 츈 소프트에서 발매된 슈퍼 패미컴 용 소프트. 동사에 의한 사운드 노벨 시리즈 제1작. 차후의 비주얼 노벨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또한 Leaf의 시즈쿠나 키즈아토의 다회차 플레이를 전제로 한 게임 디자인도 본작을 통해 확립되었다.

(xiv) 요코야마 치사 성우. 애칭은 치사타로. NG기사 라무네&40의 밀크역, 사쿠라 대전의 진구지 사쿠라 역 등을 담당했다. 지금은 사라진 점프 방송국에서 어시스턴트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



세계와 룰에의 의식 TRPG로부터의 영향, 동방 시리즈라는 신성단, 픽션의 역할

타케우치:아까 TRPG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나스가 뛰어난 마스터였던 건 채찍과 당근을 능숙하게 사용해서입니다. 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이상엔 죽은 사람을 되살리거나, 날아가 버린 걸 고치는 등의 무리한 일은 용납하질 않았지만 잃어버린 것을 대신하는 무언가를 준비하는 면이 뛰어났습니다. 그 채찍과 당근의 사용법이 나스가 게임을 만들 때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경우는 그게 별로 없고 나스 키노코의 원액이 깊게 우러난단 인상이죠.

무라카미:공의 경계에서 료우기 시키가 손을 잃었을 때 아오자키 토우코가 지나가는 말로 의수를 달아주겠다는 말을 하는데, 얼핏 계산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통은 황당할 장면이죠. 그런 위화감을 소설에선 휙휙 넘겨버리는 데 반해 게임 쪽에선 유저 친화적인 조정이 이루어져 있단 느낌을 받습니다.

나스:소설에선 로스트와 빌드가 등가치거든요. 잃어버린 일 자체는 괴롭겠지만 대신 얻는 것도 있죠. 다만 그렇더라도 평등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한 편 게임에선 로스트 한 뒤의 빌드에 두배의 가치가 있게 설정합니다. 무언가를 상실하고 심리적으로 대미지를 입은 뒤에 의수에 맞먹는 것이 주어지고 결과적으로 플러스가 된단 이미지입니다.

타케우치:아쳐의 팔이 시로에게 이식된 순간이 딱 그거죠.

무라카미:아쳐의 팔은 말도 안 되는 치트 같지만 사실은 Unlimited Blade Works를 쓸 수 없으니까 능력은 한정되고 쓰는 동안 정신도 육체도 점점 엉망이 되어가죠. 그러니 반대로 잃어버린 팔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단 사실을 강조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타케우치:그게 바로 채찍이지요. 한 편으로 캐릭터의 의외의 일면이나 유저를 위한 서비스신 같은 부분엔 명확한 당근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TRPG에서 갈고 닦은 스킬이 활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TRPG에 빠져있던 라이터는 많거든요.

나스:호시조라 메테오(xv) 씨나 우로부치 겐 씨, 하가네야 진 씨나 히가시데 유이치로 씨도 그렇죠. 진 씨랑 유이치로 씨는 지금도 현역이거든, 부러워!

타케우치:눈 앞에 있는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뇌세포를 풀가동하는 경험을 젊을 적에 해두면 남에게 쾌락을 주는 것과 자기 자신의 쾌락을 잇는 회로가 만들어지는 걸지도 몰라요.

나스:어쩐지 알 것도 같네. TRPG는 다섯의 원 맨 집단이 "나한테 상을 내려라." 하고 마스터한테 덤벼드는 물건이거든요 (웃음) 그래서 이야기를 제어해가며 어떻게 다섯 명에게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사용할지를 리얼타임으로 생각하죠. 크레에이터로서 제법 훈련이 됩니다.

무라카미:TRPG를 시작했을 무렵엔 어떤 식으로 즐기고 계셨는지?

나스:사실은 처음부터 오리지널이었어요. D&D는 재미있었지만 중학생에겐 너무 비쌌죠. 거기서 선배가 "너희 같은 빈털터리를 위해 T&T가 있다!" 하길래 건네받아서 플레이해봤습니다만 곧바로 "D&D가 더 재밌구만." 하고 질려버려서…젊은 날의 과오입니다. 용서해주세요. 저는 TRPG에서 당시 빠져있던 키쿠치 히데유키(xvi)가 되고 싶었습니다만 T&T에선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담 스스로 만들 수밖엔 없다, 하고 되지도 않는 생각을 했죠. 결국 D&D의 즐거움에 눈 뜬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이후입니다. 오리지널로 생각해봐도 잘 풀리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고 그런 식으로 빌드를 쌓은 결과 복잡한 물건이 나와버렸죠. 거기서 지인이, 돈도 있으니까 D&D에 진지하게 도전해 보겠다 하고 세트를 사왔거든요. 새로 플레이해보니까 완전히 신세계였죠. 심플한데도 이렇게 재미있는 게 만들어질 수 있다니 놀라웠습니다. 역시 D&D는 최고야, 하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웃음)

무라카미:제 인상입니다만 hollow는 신죠 카즈마(xvii) 씨의 봉래학원의 이미지와 가깝다고 봅니다. 그게 앞서 말씀하신 2차 창작의 전개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되면 오히려 ZUN(xviii)씨의 동방 시리즈(xix)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나스:동방은 80년대 사람이 묘사한 봉래학원을 시작으로 한 거대학원물, 거대한 모형정원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포지션이라고 생각합니다. 모형정원은 우선 부지를 만들고, 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니츄어 세계 속이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란 식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놀 수 있게 하는 조형입니다. 한 편 동방 시리즈는 '경계'와 캐릭터 마스만을 준비해두죠. 그 마스 이외 부분은 안개에 싸여 완전한 언노운입니다. 예를 들어 하쿠레이 레이무는 낙원의 멋진 무녀, 쾌청의 무녀 같은 별명이나 「하늘을 나는 정도의 능력」이란 설정만 지키면 2차 창작에 대해서 누구도 터치하질 않아요. 귀찮은 룰이 거의 없다는 점이 지금 시대에 적합하죠. 요리는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재료만 주면 우리들은 알아서 놀 수 있다. 그런 게 지금의 목소리가 아닐런지. 저희 세대라면 동방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건 세계의 입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방은 입구를 찾는 게 아니라 뛰어드는 감각이 아닐까요.

타케우치:우리가 고등학생쯤이던 시절엔 파이브스타 스토리(xx)가 유행하는 등 누군가가 만든 거대한 이야기에 관계해가는 타입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동방에 대한 유저의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큰 이야기에 동화하기보다 스스로도 개입해서 이것저것 조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스:일전에 굉장히 퀄리티가 뛰어난 동방 동인지를 읽었습니다만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하지만 이 캐릭터를 안 써도 딱히 상관없지 싶은데…'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다들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도, 그에 적합한 캐릭터를 아직 잘 만들 수 없는 거죠. 그럴 때 동방과 같은 존재가 있으면 완성도 높은 캐릭터를 써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들 캐릭터에 대한 인식도 이미 완료된 상태이니 자신의 세계를 독자가 이해하는 가장 난이도 높은 작업도 간단히 클리어할 수 있고요. 그런 면은 틀림없는 강점입니다. 그런 식으로 언젠가 자신만의 세계를 묘사할 힘을 쌓아올리면 되겠죠.

무라카미:그런 식으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는 동방 이외에도 하츠네 미쿠 정도를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보다도 저는 가장 적절한 예로 야루오를 꼽습니다. 그건 어미에 오를 붙이는 것 이외에 공통 인식적인 룰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림만 준비해두고 '오'를 붙이면 단순한 일기 같은 것도 야루오 작품이 되어버립니다. 이건 2차 창작적으로도 스토리를 보완하거나 무언가에 참가하는 식의 욕망과는 다르다고 보거든요. 자신의 표현 툴이 갖고 싶은 것 같긴 한데, 이런 것만 쓰면 깊이가 없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스:발신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모두의 에고가 팽대해, 자신도 무언가 발언하고 싶단 욕망이 강해지고 있는 거겠죠. 야루오나 미쿠는 그 대표격입니다만, 동방은 조금 색채가 다르다고 봐요. ZUM씨는 저희와 비슷한 세대인 모양이니 하고 싶은 것은 비슷할거라 생각합니다. 단지 슈팅 게임이란 형식과 유저의 욕망이 매치한 결과 동방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생물로 성장했습니다. 그건 스타 이터, 새로운 은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이며 최종적으로 얼마만큼의 규모에 이를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그걸 바라보며 착실하게 그 안의 별 하나하나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고 싶네요.

사카우에:지금 언급된 하츠네 미쿠, 야루오, 동방은 하나같이 인터넷이 보급된 지금 시대와 찰떡궁합이죠. 요 10년의 컨텐츠 소비로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인터넷상에 준비된 장소나 소재를 이용함으로써 유저가 제작 측으로 돌아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점입니다. 저는 그게 이야기의 내용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최근의 라이트노벨 유행을 보면 이해하기 쉽죠.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이후라 생각합니다만, 독자가 공감하기 쉬운 주인공을 놓고서 그와 히로인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사자에상적으로 흘러가는 타입의 소설이 굉장히 많습니다. 파워풀한 이야기보다도 2차 창작으로 전개하기 편한 소재가 선호된다는 인상이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것만 범람하게 되면 정말로 재미없어요. 단순히 일상이 계속되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별 차이 없으니 픽션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지지요. 그렇기에 유저나 독자에게 소재가 되는 이야기나 캐릭터를 발굴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이야기의 재미나 스케일을 유지해 가는가 같은 것도 중요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타케우치:원래 같아선 독자의 공감을 살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여러 세계로 링크시켜 나간다는 스타일은 미소녀 게임의 역할이거든요. 그렇기에 2000년 즈음의 미소녀 게임은 히트작이 많았던 거고요.

무라카미:사카우에가 한 말을 게임으로 치환하면 MMORPG(xxi)가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콕 찝어서 말하자면, 라그나로크 온라인은 메일 게임을 박살 내고 TRPG를 약체화시키는 계기가 됐죠. 툴을 다운로드해서 접속하면 곧바로 게임을 할 수 있으니까 간편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최종적으론 게임을 할 필요 자체가 없어져서 그저 거기서 채팅을 하고 있으면 OK란 문화가 형성된 거죠. 사카우에가 라이트노벨을 놓고 말한 것처럼, '이야기'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연결'에의 욕망이 여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제 개인적인 바램으로서도 역시 이것만으론 재미가 없습니다. 확실한 스토리가 필요하고, 그런 게 없으면 어느 문화가 되었건 쇠퇴해갈 테죠.

나스:저는 동방 쪽이 들썩이는 걸 바라보며 "아아, 드디어 이야기가 패배하기 시작했어. 우리들이 필요 없어질 세계도 가깝구나. 후하하." 같은 말을 했죠. 그랬더니 타케우치군이 "그런 꼴사나운 말 하지마. 세상을 네가 바꿔버려. 네가 만들 거대한 해머로 때려눕혀 버려." 라고 하기에 '멋있는 소리 하시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떤 오락이건 재미는 있으니까. 오락의 형태는 시대에 맞춰 변하는 것이고, 지금 느끼고 있는 건 유저가 오락을 관리하거나 농도 짙은 이야기를 바라는 욕망이 약해진 걸까……? 정도고.

사카우에:적잖은 사람에게 있어 픽션의 역할이 바뀌고 있단 점도 있겠죠. 케이온을 보고 그걸 장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나스:아니, 케이온으로 인생이 바뀌는 사람은 꽤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타케우치:하지만 거기서 말하는 변화는 거대한 이야기와 만났을 때에 인생관이 바뀌는 것 같은 경험과는 다른 거 아닐까.

나스:뭐 확실히 케이온은 막막하던 삶에 빛이 비췄다던가, 이 방송과 함께 살아간다던가, 그런 경험적인 변화겠죠. 단, 받아들이는 방식엔 세대에 따른 차가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부모가 상처를 입은 마지막 세대이지만 요즘 십 대 중반 아이들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평탄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그들에게 갑자기 보리밥을 먹으라고 해도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지은 밥은 맛있게 먹고 있잖아요. 거기에 질렸을 때, 그러고보니 보리밥 먹어보란 소릴 들은 적이 있었지 하고 기억해내고 "이거 맛있는데?" 하고 느끼는 경우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카우에:요즘 젊은 세대는 어느 의미론 상처를 입는 게 당연한 상태가 된 감이 있을 거거든요. 매일이 당연하다시피 계속되고 그 중에서 압도적인 절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희망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란 낙차가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농도 짙은 픽션보다 가볍게 흡수할 수 있고 친구와 커뮤니케이션하거나 약간의 화젯거리로도 쓸 수 있는 쪽의 픽션을 선호하게 되겠죠.

타케우치:픽션엔 당연히 심심풀이란 땅콩적인 측면도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이 최강의 심심풀이 툴이죠. 인터넷상에서 매일 여러 인간이 재밌는 이야길 늘어놓는 와중에 상품을 가지고 재미를 제공한다는 건 제법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xv) 호시조라 메테오 전 라이어 소프트의 시나리오 라이터이며 현재는 TYPE-MOON에 소속. 쿠사리히메 Forest 등의 대표작이 있다. 그 개성적인 작풍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영역. Forest의 연출이 비주얼 노벨의 가능성을 압도적으로 넓혔음은 틀림없다.

(xvi) 키쿠치 히데유키 마계도시 시리즈나 흡혈귀 헌터 D 시리즈 등의 대표작이 있는 작가. 에로스와 바이올런스를 도입한 작풍이 특징. 무기, 총기 매니아로도 유명.

(xvii) 신죠 카즈마 SF작가, 라이트노벨 작가. 서머/타임/트래블러 (제 37회 성운상 일본 장편 부문 수상) 등의 대표작이 있다. 또 한때 야나가와 후사히코 명의로 PBM게임인 「봉래학원의 모험!」의 그랜드 마스터를 담당하기도 했다.

(xviii) ZUN 동인 게임/동인 음악 서클 상해 앨리스 환악단의 운영자이며 유명한 동방 시리즈 제작자. 팬에게선 신주라 불린다.

(xix) 동방 시리즈 ZUN이 제작한 탄막 슈팅 게임 시리즈. 환상향에 사는 개성적인 캐릭터가 다수 등장한다. 게임으로서의 재미와는 별도로 그 독특한 세계관에 매료된 팬에 의한 2차 창작이 폭넓게 전개되고 있는 점도 특징

(xx) 파이브스타 스토리 애니메이션 잡지 월간 뉴타입에서 1986년 4월부터 연재되고 있던 SF만화. 작가인 나가노 마모루는 장르를 「옛날이야기」라 공언했다. 단행본의 판매누계는 800만 부 이상.

(xxi) MMORPG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의 약칭.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RPG라 번역할 수 있다.



TYPE-MOON과 비주얼 노벨의 10년

사카우에:조금 사정거리가 긴 이야기인데, 비주얼 노벨은 90년대 후반의 작품과 2000년대 중반 이후 작품의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작품톤이 하나같이 어둡거나 강렬한 광기를 품고 있었지만 후자에 와선 알기 쉬운 모에 요소를 안정 공급해주는 작품이 팔립니다. 예를 들어 지금 18살인 아이가 태어난 게 1993년이니까 헤이세이 불황의 한복판 속에서 태어나 사춘기를 보내고 나니 대지진과 원전사고를 경험하게 된 셈이에요. 그러다보니 희망이란 것을 상상하기가 어려워지죠. 그렇담 강렬한 희망을 제공하는 이야기보다도 가볍게 즐기고 커뮤니케이션 툴로도 쓸 수 있을 작품 쪽에 시선이 가는 편이 자연스러울런지도 모릅니다. 그보다 10세나 20세 이상 세대가 되면 이번엔 지하철 사린 사건이란 인위적인 대사건, 인간이 지닌 광기를 체험한 세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Tactics의 MOON 같은 옴진리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어딘지 모를 호러적인 기분을 맛보면서도 즐길 수 있는 회로를 지니고 있죠. 그런 광기가 지금 성립할 수 있는지는 고개가 좀 갸우뚱해지네요.

나스:월희나 Fate의 차이는 월희는 구세대의 게임에 속하며, 주인공인 시키는 자기 인식이 확립되질 않고 스스로의 상처를 세상에 오픈해놓는 캐릭터란 거죠. "나는 이렇게나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그걸 알아다오."라는 테마가 있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뿐만이 아니라 90년대 후반까지는 여러 장르에서 내몰린 주인공이 "나는 세상한테서 버림받았단 말야. 좀 더 내게 신경 써 줘." 하고 주장하는 작품이 만들어졌죠. 그럴 수 있었던 건 아직 버블의 잔거품이 있어서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타인의 상처를 보살필만한 여유가 있었어요. 그러던 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두가 완전한 개인주의가 되어 남의 상처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너는 그렇게 말하지만 나도 힘들다, 하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거기서 상처를 어필한들 솔직히 말해 짜증 날 뿐이죠. 그런 점도 있고 해서 Fate에선 본인조차도 자신의 상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린이나 세이버가 지적하지 않으면 자신이 상처입었단 사실조차 모르죠. 이런 식으로 시대가 바뀌는 거라 생각합니다. 90년대까지는 자신의 상처를 어필하는 주인공, 2000년대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차리지조차 못하는 주인공. 그다음엔 어떤 주인공이 받아들여질지는 시대를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뭐 주인공의 스타일이 어쩌고를 넘어서서 '이제 주인공마저도 필요없는' 이야기가 메인이 될 날도 올 거라 생각합니다만.

사카우에:또 하나의 중요한 점으로 비주얼 노벨이란 장르의 내용만으로 생각해도 이른바 보이 밋 걸의 이미지가 달라진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남성 주인공이 히로인을 구하는 이야기라는 이미지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했습니다. kanon이나 AIR와 같은 key 작품이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로선 작품 내의 여성은 단순히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아니지요. 소년이 일방적으로 노력해서 소녀를 구하는 것이 아닌, 함께 싸우거나 함께 행동함으로써 처음으로 세계가 열리는 듯한 구조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나스:성적으로 단순히 여성상위로 시프트하는 것만이 아닌 공존 하고 있는 상태로군요.

사카우에:타카히로씨의 츠요키스나 여장남자물인 루이는 토모를 부른다와 같은 작품을 플레이해보면 성적인 밸런스가 비주얼 노벨 속에서도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죠.

타케우치:이야기 내적으로 남성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문제없다는 케이스가 늘고 있습니다.

나스:동방의 히트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자신을 투영할 남자아이가 작품 내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성립할 방법론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작품 내에 보내지 않고 저 귀엽게 만들어진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OK인 거구나 하고.

타케우치:남성측이 자신도 귀여운 여자아이가 되고 싶다는 식으로 느끼기 시작했단 점도 있겠죠. 지금 미소녀 게임이 팔리지 않게 된 이유엔 단순히 남자아이들의 성욕이 줄어들었단 점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스:초식계는 고사하고 드디어 풀 그 자체가 되었단 소리가 나올 정도니까요 (웃음) 가정을 가진다 한들 나라에 미래가 없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하는 감각도 있을 것이고, 오락이 이상하리만치 늘어난 점도 있어서 이 나라에선 더이상 아내나 아이를 가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감각이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이상 남존여비로 되돌리는 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오타쿠 문화가 봉건적인 구조에서 여성 상위의 세계로 슬라이드 했다고 치고, 그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거라곤 도저히 볼 수 없단 생각도 들지만요. 케이온은 전형적인 여성상위물입니다만 거기에 이야기는 없잖아요.

나스:아니, 그건 여성 상위라기보단 단순한 남성 부재라고 생각해야죠. 여자아이를 제일 소중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자를 애초부터 등장시키지 않는 거니까 적대 세력이 없는 농장을 구축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선 여성을 보다 마스코트화……경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작자 측이 아닌 시청자 측이 말이죠. 제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는 자주 "나스씨는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네요. 강한 여자아이가 활약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까" 하는 소릴 들어서 스스로도 그런가 보다고 있었습니다만 최근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합니다. 월희나 Fate나 전선에서 싸우는 건 알퀘이드나 세이버 같은 히로인이고 주인공은 후방에 있죠. 공의 경계에서도 전투는 히로인인 료우기 시키 담당이고 주인공인 코쿠토 미키야는 처치 곤란한 히로인을 먹여 살릴 뿐인 남자입니다. 이건 제법 심각한 남존여비 구도거든요. 강인한 피지컬과 강인한 멘탈, 이 두 가지의 강함을 고려할 때, 후자 쪽이 얻기 힘들 겁니다. 무기를 들면 누구나 강해지지만 강인한 멘탈은 무기만으론 얻을 수 없습니다. 나스 키노코의 작품은 무력을 히로인에게 양도하고 남성 캐릭터에게 심력을 부여합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안에도 고리타분한 부분이 있구나 싶었죠. 예를 들어 알퀘이드는 TYPE-MOON 월드 최강이라 불리지만 동시에 시키에게 헤롱헤롱이라 그가 하는 말이라면 져주는 측면도 있거든요. 그 시점에서 남성 쪽이 우위가 되는 겁니다. 정말로 평등한 관계로 가려거든 알퀘이드는 가지고 있는 파괴력을 몽땅 긁어모아서 시키를 골로 보내버리면 되는거거든요. "이 양다리 새끼가!" 하는 느낌으로다가 (웃음)

사카우에:알퀘이드는 양면성이 강렬한 히로인이에요. 평소 시키와 이야기하고 있을 땐 바보 여자란 소릴 들을 만큼 유아성이나 순수함을 보이는데 화제가 진조의 기원이나 적의 정체 같은 데로 굴러가면 갑자기 진조의 공주님다운 시리어스 모드로 이행하거든요.
나스:무력을 지닌 히로인이 그에 걸맞은 정신적인 스펙도 지녔으면 한 거죠. 린도 세이버도 알퀘이드도 단순히 나사 빠진 히로인이 아니거든요. 단지 멘탈이 강할 뿐인 주인공이 그런 완벽한 히로인에게 무언가를 일깨운다는 행위 자체가 현실 사회에선 남성 쪽이 이긴다는 구도의 메타포로 보이기도 합니다. 평등한 세계를 지향한다면 케이온처럼 남성을 지우는 것도 히로인이 반했다는 약점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것도 아닌 대등한 관계를 생각해야지 싶어요.

사카우에:이번 회 이 잡지의 타이틀에 미소녀 게임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비주얼 노벨이란 용어를 쓴 것도 그런 게 이유인데, 미소녀 게임이라고 해버리면 그 순간에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공략하는 게임이란 이미지가 딱 굳어버립니다. 하지만 막상 요즘 나오는 미소녀 게임은 여자애와의 연애나 소녀의 구제란 요소가 옅은 것도 많습니다. 최근의 빅 타이틀이라 하면 key의 Rewrite도 전 연령대상인데다 섹슈얼한 부분도 거의 등장하질 않고 있죠.

나스:섹슈얼한 부분의 유무는 그 이야기에 필요한가 아닌가로 생각해야 하니 딱히 문제가 아닙니다만, 이번 Rewrite는 게임 부분의 진화가 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ADV가 게임으로 성립하는가. 선택지나 멀티엔딩만이 아닌 화면을 통해서 그림과 글을 출력한단 면에서 진화가 정체됐어요. 다른 메이커라면 상관없지만 key는 업계를 대표하는 톱 메이커입니다. 선봉장이 시스템의 향상을 꾀하지 않으면 뒤따르는 자들도 멈춰버릴 수밖엔 없거든요. 비주얼 노벨의 불황 이유 중 하나는 연출 면이 한계에 다다랐단 점입니다. 한가지 포맷을 10년 이상씩이나 사용하면 그야 다들 질리지요. 이건 비평을 하는 사람에겐 쓴소리로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비주얼 노벨을 논할 때엔 시나리오만으로 판단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시스템, 연출, CG, 음악에서부터 나아가선 판매전략이나 패키징까지 합해서 하나의 게임이기 때문에.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시나리오만을 논할 거면 소설을 가지고 하면 될 일입니다. 일개 소비자가 아닌 비평하는 측의 인간이라면, "게임이나 만들고 보고 비평해라."란 멍청한 소리까진 안 하겠지만 이 상품은 어떠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인가 정도는 배워 줬으면 합니다. 제작자를 위해서가 아닌 이제부터 제작자를 지망하는 차세대를 위해서.

사카우에:명심해야 할 이야기네요.

무라카미:옳으신 말씀입니다. Rewrite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면 단적으로 말해 굉장히 아까운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작품 내에 맵피란 휴대전화를 쓴 기능이 등장하는데 그걸 전혀 제대로 살리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Steins;Gate나 『THE IDOLM@STER』처럼 휴대전화를 잘 살려 시스템 속에 녹여내 새로운 플레이 감을 내려는 조류가 있는 와중에 그걸 회피해버린 점이 안타깝죠. 시나리오 중시형 게임일수록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플랫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할 텐데요. 물론 기술적인 곤란이야 있겠습니다만.

사카우에:비주얼 노벨에 사람들이 열광한 가장 큰 이유가 게임 특유의 시스템이나 연출을 써 소설과는 다른 쾌락을 낳는단 점을 꼽을 수 있겠는데, 거기서 갱신이 멈춰버리면 그럼 삽화 딸린 소설로 낼 것이지 왜 게임으로 내느냔 소릴 듣게 되겠죠.

나스:분기하는 이야기 측면에서 게임성을 낼지, 게임이란 포맷으로밖엔 맛볼 수 없는 이야기를 연출할지. ADV를 제작할 때 제작자가 그 중 어느 쪽 노선을 탈지 정해야 합니다. 게임이란 포맷을 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파고들어 가보면 게임에 자유도는 존재하질 않아요. 단지 그 장르에서 뿐이 맛볼 수 없는 만족감이 있을 뿐입니다. 이야기가 루프물로 돌아갑니다만,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에선 허용될 수 없는 Try&Error란 재미 면에서 루프물은 우수하거든요. 같은 장면인데도 미묘하게 다른…그런 연출은 게임이 아니면 어려워요. 소설에선 기본적으로 할 수 없다고 해야 하나, 페이지 낭비일 뿐이죠. 유일한 결점은 루프물은 여러 번 시도할수 없다는 점. 각 메이커에서 단 한 번밖엔 쓸 수 없는 물건이에요. 두 번 해버리면 이 메이커는 또 이거냐 하는 인상을 주니까요.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나면 다음엔 게임으로서의 가치를 어디서 추구할지를 생각합니다. Steins;Gate처럼 우리들 일상에 있어서의 문명의 진화란 기믹을 쓴 작품으로 만들어갈지 아니면 스퀘어 에닉스 게임처럼 전체적인 퀄리티를 향상하는 방향으로 갈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전자처럼 지금의 현실에 맞춘 게임성을 살리기 위해선 시나리오도 거기에 핀트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이번 테마는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입니다, 하는 식으로 결정 나 있으면 시나리오의 방향성도 보여오지요. 2005년의 「가장 끝자락의 이마」가 바로 그런 테마를 다룬 작품입니다만 그건 훌륭히 시대성을 포착한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머신 인터페이스상에서 즐기는 노벨, 이라는.


나스 키노코의 새로운 경지――그리고 비주얼 노벨의 미래를 향해서

사카우에:나스 씨는 점점 작업의 폭을 넓혀가고 계신 데 저는 특히나 3/16사건(xxii)의 소설 「MAGNITUNING」가 자극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에노모토 쥰지(xxiii) 씨가 그린 대사가 일절 존재하지 않는 만화의 소설화를 꾀한 시도인데, 나스 키노코의 새로운 스테이지를 강렬하게 목격한 기분이었습니다.

나스:에노모토 씨는 확고한 만화관을 지닌 사람이고 완성된 원고도 엄청나서 소설화할 적엔 깨나 골치 썩어야 했습니다 (웃음) 만화 기법이 너무 참신한지라, 이쪽도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도 대응하던가, 아니면 성실하게 재현하던가 둘 중의 하나로 갈 수밖엔 없겠다 싶었죠. 일주일간 생각한 결과 비등할 만큼 센스 있는 표현은 떠오르지 않고 이건 결국 15년간 글을 써온 자신의 스킬을 믿고서 순수한 소설가로서 가보자. 그걸로 재미가 있다면 승리, 재미없다면 패배, 그런 식으로 자신을 몰아넣어 봤습니다. 속도감을 무기로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한 행이라도 쓰기 시작하면 노타임으로 마지막까지 써낼 수밖엔 없다. 그런 식으로도 몰아넣었죠. 굉장히 스릴 넘치는 작업이었습니다. 사카우에 씨 말대로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억지로 벗겨 낸 기분입니다 (웃음)

사카우에:그건 정말 대단했어요. 대사도 설명도 하나도 존재하질 않는 만화에서 이런 식으로 캐릭터 설정을 만들 수도 있구나 하고, 그 테크닉에 감동했습니다.

나스:그건 역시 15년간의 축적이겠죠. 많은 사람이 보아주면 그만큼 경험치도 쌓이는지라, 싸워온 시간이 구체적인 형상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써 올리던 때는 주제에 안 맞는 의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15년간이 틀리지 않았다는 손맛이 있었습니다.

사카우에:분위기를 보면 여태까지의 나스 씨의 어느 작품과도 다른 물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스 씨의 현대사회에 대한 견해가 자연스럽게 들어간 부분은 특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늘의 테마와도 연결되는 부분인데, 「이야기가 중요시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지금은 개개의 캐릭터들의 넋두리와 그것을 자기보완 해서 재구성하는 독자들이야말로 최신의 향락자다.」 란 문장을 읽고 나스씨는 이런 시점을 가지고 있는 건가 하는 놀라움이 있었습니다.

나스:뼛속까지 지조가 없는 거죠. 야라온(xxiv)을 보고서 희노애락하고 있으니 (웃음) 하지만 그런 갈대 정신이 있기 때문에야말로 현대의 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부분도 있는 거겠죠. 40대 전후 인간으로선 인터넷 도래 이후의 문화에 괄목함과 동시에 위기감도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소릴 늘어놓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강점이기도 하니까 그것 자체를 엔터테이먼트로 만들면 의의도 생긴다. 늙탱이가 돼버린 자신을 가지고 놀아보자 하는 식으로 요 1~2년 동안은 발상이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죠.

무라카미:기본적으로 나스 씨의 작품은 세계관을 공유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같은 세계관을 쓴다는 건 고유결계를 펼치고 그 심오함에 빠져가는 듯한 면이 있죠. 게임 제작은 같은 사상을 스태프와 공유해서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식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에노모토씨와 작업함으로써 고유결계의 외곽이 제시된 기분이 듭니다.

사카우에:이제부터도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나스 씨의 새로운 시도를 볼 수 있게 될거라 보는데, 비주얼 노벨 영역에선 현재 어떠한 일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나스:일단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지금의 포맷으로 가능한 한의 최고의 진수성찬을 차리는 것. Fate까지는 분명히 풀코스를 만들고 있단 인식이었죠. 다소 유저의 입맛엔 맞질 않는 부분이 있었더라도 이 물량이라면 만족해 줄거야, 하고 요리를 내놓았습니다만 다음엔 이것밖엔 없다는 극상의 일품을 내놓고 싶습니다. 그게 마법사의 밤입니다. 입맛이 다른 사람이 먹더라도 이 요리가 잘 만들어졌단 건 알 수 있는, 그런 ADV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한번 거함거포주의로 돌아가고 싶네요. 거기로 돌아가서 볼륨과 질과 강렬한 악센트를 지닌 요리를 내놓아 다시 한번 자신의 세계관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습니다. 오타쿠 업계는 이후 빠르고 넓은 광장을 통해 이야기가 만들어져가는 세계가 되는가, 그 속에서 거대한 탑을 쌓는 방식이 통용되는가, 라는 물음을 자신과 유저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타케우치:우리가 90년대 말에 게임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대의 뒷받침도 있어 운 좋게 지금 위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 만들어낸 월희라는 작품을 사랑해주신 유저가 지금은 실력 좋은 스태프로 참가해주어서 Fate를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TYPE-MOON이란 팀은 굉장히 축복된 환경이고, 그건 좀 더 이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세상 속은 엄청난 스피드로 변화하고, 그것은 이야기 속 세계도 예외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에야 애니메이션은 화제의 중심에 놓여있지만 2000년쯤에는 거의 화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들은 비주얼 노벨 쪽으로 전개해서 잘 풀렸습니다. 하지만 장르의 세력적인 의미에서 상황은 역전됐습니다. 그걸 참작한 상태에서 우리는 게임에 집착하지 않고 이런저런 것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애초에 당시 게임을 선택한 이유는 그게 가장 주목 받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년 지나 상황이 바뀐 이제와서 구애받고 싶지는 않다. 월희의 성공은 우리들에게 있어 보물과도 같기에 어드벤처 게임에 대한 애정을 잃을 생각은 없지만, 지금 애니메이션이 강세라면 나스에게도 그것에 도전해주었으면 하고도…

나스:싫어-(웃음)

타케우치:우로부치 씨를 쓰러뜨리는 거야!

나스: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계약 우주인이랑은 못 싸우거든요! 스타쉽 트루퍼스 찍게 하지 마시죠!(눈물)

사카우에:애니메이션 이외의 영상작품으로 키를 트는 경우도 있을까요.

나스:그럴수야 있겠지만 저는 얼마나 시대가 바뀌건 이야기를 축으로 만들어지는 결정結晶이란 것이 받아들여지는 한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에 유저로부터 그건 이제 됐습니다란 말을 듣는다면 그럼 유저분이 바라는 문화로 재미있는 걸 만들어보자, 하고 바뀌면 되니까요. 저는 미소녀 게임이 좋았고 그걸 통해 성장해왔으니까 이게 먹히는 동안은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대로 소셜 게임이 세력을 불려 가 게임이 값싸고 대중 지향이 아니라면 팔리지 않는 상황이 되었을 때 나스 키노코는 쓸모가 없어지겠죠. 맛이 너무 진하니까. 그렇게 되면 저는 기쁘게 은퇴하고 애니메이션 업계의 일개 병사로서 입대하고 싶다고나 할까…

타케우치:뭐 소셜 게임을 만드는 나스 키노코도 보고 싶기는 하네. 지금껏 없었던 게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스:일하기 싫어-(웃음) 하지만 방금 타케우치가 말한 대로 90년대까진 애니메이션이 임금님이었거든요. 그게 너무 강해져서 찍어내다시피 한 대가로 2000년대 정도까진 장르 인기가 감소했죠. 그 틈을 찔러 미소녀 게임이 일약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때까지 10년간 가혹한 환경에 놓여있던 게임 메이커가 오락의 선배인 애니메이션 업계를 무찌른 거죠. 하지만 2004년 이후 이번엔 우리들 게임 업계 쪽이 태만해져 애니메이션 업계의 역습을 받았어요. 그게 작년부터 시작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대공세에도 가닥을 드리우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열세인 미소녀 게임 업계, 비주얼 노벨 업계도 칼을 갈고 있는 녀석이 분명히 있을 거거든요. 저는 거기에 걸고 싶고 저 역시도 역습의 선봉장을 담당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우리는 나스 키노코나 TYPE-MOON에 제대로 독을 쏘인 인간이니 그 충격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가고 싶네요.

사카우에:동감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도 새로운 자극이나 재미를 전달해주시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나스: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우리도 기쁘죠.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결국 그저 재미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욕심이 생겨서 재미있는 것만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것을 만들고 싶어져요. 이건 필요하긴 하지만 방해요소이기도 하거든요. 유저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쌓아올린 것을 반영시킬 수 있는 작품을 고릅니다. 자신의 의견, 사상을 제대로 출력할 수 있는 장치를 받아들이니까요. 그래서 제작측에선 자신의 의견을 억지로 밖으로 끌어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걸로 작품을 칠할 필요는 없거든요. 단지 안쪽 깊은 곳에 의미를 가지고서 만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읽는 측에선 그걸 알아서 파악해 확장해주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일단 재미있는 걸 만든다, 거길 중심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xxii) 3/16사건 2011년에 고단샤 BOX에서 발매된 나스 키노코와 에노모토 유이치에 의한 콜라보 서적. 나스의 소설을 에노모토가 만화화하고, 에노모토의 만화를 나스가 소설화한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xxiii) 에노모토 쥰지 만화가. 독특한 작풍이 특징이며 GOLDEN LUCKY, えの素 등의 대표작이 있다.

(xxiv) 야라온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에 대한 정보를 취급하는 2채널계 대형 마토메 사이트. 모에 업계에선 가장 화제가 되는 사이트 중 하나다.


덧글

  • 000o 2012/07/09 19:56 # 답글

    우와~ 번역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0000 2012/07/09 23:17 # 삭제 답글

    긴 글 잘 읽었습니다. 페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즐거웠네요... 번역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 2012/07/10 10:3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하늘의꿈 2012/07/10 14:29 # 답글

    업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많네요 잘보았습니다
  • animator 2012/07/11 00:24 # 답글

    스크롤압박이 강력하여 일단 Evernote에만 저장해갑니다만..:-)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 시렌 2012/07/12 13:42 # 답글

    타입문 작품중엔 페이트만 해봤는데 여러 의미로 대단한 거 같네요. 나스도 타입문도
  • 냐가 2012/07/14 19:55 # 삭제 답글

    덕분에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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